손글씨로만 하루 보내기 도전기
– 디지털 디톡스, 해보니 뭐가 남았나 평소처럼 폰으로 메모하고, 일정은 캘린더, 기록은 노트 앱. 편하긴 하다. 그런데 자꾸 하루가 갈가리 찢겨 나가는 느낌이 든다. 알림 하나에 생각이 끊기고, 다시 돌아오면 흐름이 사라져 있다. 그래서 하루만이라도 손글씨로만 살아보기로 했다. 메모, 일정, 할 일, 회의 정리, 심지어 장보기 목록까지 전부 종이와 펜. 과장 없이 해보고 느낀 걸 적어둔다. 결론부터 말하면, 불편은 있었고, 그만큼 얻는 것도 분명했다.
1) 준비 – 폰 없이도 굴러가게 ‘그릇’부터 바꿔놓기
핵심은 의지가 아니라 세팅이었다. 시작 전에 이 정도는 바꿔놨다.
얇은 A5 노트 2권 + 0.5 펜 2자루 한 권은 ‘외부용(일정·볼 일)’, 한 권은 ‘내부용(생각·아이디어)’. 구분을 해놔야 나중에 찾기 쉽다. 펜은 잉크 흐름 좋은 걸로 두 자루. 분실·잉크 끊김 대비.
하루짜리 종이 플래너 템플릿 빈 A4에 직접 만들었다. 상단: 오늘 날짜/장소/에너지 상태(상·중·하 체크) 좌: 시간 블록(06~22시, 1시간 간격) 우상: 오늘 3대 우선순위 우하: 끝나고 회고 3줄(배운 것/잘한 것/내일 넘길 것) 출력 5장 뽑아 책상 옆에 둠.
폰은 최소 기능만 남기기 하루 도전이라도 연락은 필요하니, 비상 연락처 두 명만 알림 허용. 나머지 앱은 전부 로그아웃 + 알림 차단. 홈 화면은 전화/문자만 남김. 음악은 라디오처럼 스피커로만 틀어놓고, 곡 넘기기는 포기.
타이머 대신 키친 타이머 집중 블록을 폰 타이머로 돌리면 결국 폰을 보게 된다.
서랍에서 키친 타이머를 꺼내 50–10 사이클(50분 집중, 10분 휴식)로 고정.
공유 이슈 미리 정리 팀 채팅방에는 “오늘 하루 종이 기록 실험 중, 급하면 전화주세요” 공지. 회의자료는 전날에 프린트. 즉, 나 때문에 흐름이 끊기지 않게 땅 고르기부터. 세팅을 하고 나면 시작이 훨씬 쉽다. 이 단계에서 절반은 끝난 거다.
2) 실행 – 아침부터 밤까지 ‘손’으로만 버틴 기록
하루 흐름을 시간대별로 적어본다. 좋은 점, 막힌 점, 우회로까지.
아침 7:00 ~ 10:00 | 몸이 깨어날 때는 손필기가 잘 붙는다 일어나자마자 A4 플래너에 날짜·장소·컨디션 체크. 우선순위 3개를 먼저 박아둔다. 예) ① 기획안 초안 ② 11시 회의 메모 ③ 카드 정리
50분 블록 1회. 손글씨로 기획안 개요를 쓰니 속도는 느리지만 생각이 덜 새 나간다. 타이핑 때처럼 문장을 ‘예쁘게’ 고치느라 시간 낭비하는 일이 줄었다. 단점: 링크를 걸 수 없다. 대신 [자료: 보고서 3쪽 표]처럼 참조 표기를 남겨서 오후에 PC에서만 보완하기로.
오전 10:00 ~ 12:00 | 회의는 종이가 유리한 순간이 있다 회의 들어가기 전, 노트 첫 페이지 상단에 의제/결정 필요/열린 질문 세 줄을 틀로 만들어둔다. 회의 중엔 이 세 칸에만 채운다. 덕분에 회의가 옆길로 새면 바로 “지금 이 이야기, 결정으로 연결되나요?”라고 되돌리기가 쉬웠다.
누가 뭘 맡기로 했는지는 체크박스와 이니셜로 바로 표시. 예) [ ] 시안 1차(HS, 7/22) / [ ] 견적 확인(JK, 7/23) 단점: 공유가 느리다. 회의 끝나고 사진으로 스캔해서 보냈다. 손글씨라서 오히려 요지 전달이 빠르다는 반응도 있었다. 길지 않으니까.
오후 13:00 ~ 16:00 | 졸리는 시간, 펜으로 버티면 리듬이 끊기지 않는다 점심 후 50–10 두 사이클. 타이핑할 때 늘 열던 탭(메일, SNS, 참조 링크)이 없다 보니 몰입은 확실히 오래 간다. 종이 노트의 장점은 시야에 남는다는 것. 옆 페이지에 흐름도가 눈에 걸려서 이어 쓰기가 쉬웠다. 디지털은 탭을 바꾸면 방금 전 생각이 사라진다. 막힌 점: 숫자 계산·표 작업. 이건 그냥 포기하고 “표·수식은 내일 아침 PC에서”라고 적어두고 넘어갔다. 하루 안에 다 끝내려 하지 말자.
오후 16:00 ~ 18:00 | 잡무 타임 – 종이가 더 빠른 영역이 있다 전화 메모, 결재 순서 정리, 장보기 목록, 반납할 책 메모 같은 자잘한 것들. 이건 손글씨가 더 빠르다. 체크박스가 작업의 마침표가 된다. 할 일을 ‘쓰기 → 끝내고 동그라미’로 처리하니 작은 성취감이 계속 생긴다. 디지털 체크와 느낌이 다르다. 손끝의 피드백이 크다.
밤 21:00 ~ 22:30 | 회고 3줄, 내일 넘길 것 1개 종이 플래너 오른쪽 하단에 회고 칸. 오늘 배운 것 3 / 잘한 것 2 / 내일 넘길 것 1. 예) 배운 것: ① 회의 메모는 의제–결정–질문 틀로 ② 링크는 참조 표기로 미뤄도 된다 ③ 오후엔 표 작업 금지. 내일 넘길 것 1개를 내일 플래너 첫 줄에 미리 적어 책상 위에 올려둔다. 아침의 출발 저항이 줄어든다. 전체적으로 느낀 건, 손글씨 하루는 “완벽하게 다 하는 날”이 아니라 흐름을 지키는 날이라는 것. 중요한 걸 먼저, 덜 중요한 건 과감히 내일로. 폰을 안 만지니 정리가 간결해진다.
3) 결과 – 얻은 것/잃은 것, 계속할 버전(현실 운영안)
냉정하게 장단을 나눴다. 그리고 매일은 무리라도 주 2~3회로 굴릴 현실 버전을 만들었다. 얻은 것 집중이 길어진다: 탭·알림이 없으니 생각이 덜 부서진다. 같은 50분이라도 손글씨가 더 깊다. 생각이 ‘내 말’로 바뀐다: 타이핑은 받아쓰기가 되기 쉬운데, 손글씨는 요약·선택을 강요한다. 개요·도식이 늘었다. 회의 질이 좋아진다: 의제–결정–질문 프레임 덕에 회의가 덜 새고, 끝나고 정리·공유가 간결하다. 작업 완결감: 체크박스에 동그라미 그릴 때 오는 손맛. 별 거 아닌데, 동력이 된다. 잃은 것 검색·참조 속도: 링크·키워드 점프가 안 된다. 자료 탐색은 확실히 느리다. 공유·백업: 스캔·사진으로 우회해야 한다. 정리는 이틀 단위로 묶어야 깔끔. 표·수식 작업: 억지로 하면 시간만 날린다. 디지털에 맡기자. 현실 운영 버전(주 3일 규칙) 월·수·금 오전만 손글씨 집중 블록(각 50–10 두 사이클). 나머지는 디지털. 회의는 항상 종이 노트로 받되, 끝나고 바로 5분 스캔·공유. 표·수식·자료 수집은 디지털 전용 슬롯으로 미룬다(매일 16~17시). 주말에 노트 인덱스 붙이는 시간 20분(포스트잇 탭으로 주제별 색 구분). 도구 세트는 항상 같은 자리: 노트 2권, 펜 2자루, 플래너 용지, 클립보드 1개. 찾지 않게. 작게 시작하려면 내일 오전 첫 50분만 손글씨. 회의 하나만 종이로. 밤에 회고 3줄만. 이 셋 중 하나만 해도 차이는 보인다. 중요한 건 다시 하게 만드는 리듬이다.
마무리
손글씨로 하루를 보내보니, 불편은 예상대로였고, 집중은 예상보다 컸다. 디지털을 버리자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더 잘 쓰려면 아날로그 구간을 일부러 만들어야 한다. 손으로 적을 때만 붙는 생각이 있고, 종이에 남겨야만 굳는 결심이 있다. 내 기준으로는 매일은 아니고, 주 2~3회가 가장 현실적이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하루의 결이 달라진다. 알림이 없어서가 아니라, 흐름이 내 쪽으로 돌아오니까.